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코프 주가슈빌리 (문단 편집) === 유년시절 === 1907년 3월 18일, [[조지아인]] 이오세브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ჯუღაშვილი)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에카테리나(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야코프 주가슈빌리의 얼굴은 어머니를 거의 닮았고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았다.] 이오세브 주가슈빌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본명으로 스탈린은 본래 조지아인이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이 러시아에서 러시아인 여성 사이에서 낳은 이복동생들과 달리 [[조지아]] 출신이다.[*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러시아 제국]] 쿠타이스현이다.] 따라서 본명 역시 [[조지아어]]로 이아코브 이오세비스 제 주가슈빌리(იაკობ იოსებ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 Iakob Iosebis dze Jughashvili)이지만, 러시아어 표기를 따른 '야코프 이오시포비치 주가시빌리(Яков Иосиф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Yakov Iosifovich Dzhugashvili)'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때 카토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불충분 및 여러 지인들의 로비로 감방이 아니라 지역 경찰서장인 레치츠키 중령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스탈린과 스탈린의 어머니인 에카테리네 "케케" 겔라제가 야코프의 탄생의 순간을 지켰다. 스탈린은 자신을 도와준 바 있었던 이아코브 에그나타슈빌리(იაკობ ეგნატაშვილი, Iakob Egnatashvili)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이아코브(იაკობ, 러시아어식 표기로는 야코프·Яков)로 지었다. 당시 언론활동에 열중하던 스탈린은 야코프가 울음을 터트리면 짜증을 내곤 했지만 울음을 멈추면 즉시 아들을 간질이고 키스하며 매우 귀여워했다. 이때 스탈린이 아들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일에 야코프의 정확한 생일에 관해서 혼동이 있었다. 9월에 야코프는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혁명활동 중이었던 스탈린은 아들을 팽개치고 은행강도질을 하거나 아예 [[시베리아]] 유형을 끌려가기도 했으며 어린 아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스탈린은 가족들을 데리고 바쿠로 이주했는데 1907년을 넘기기 전에 카토가 병에 걸려 죽었다. 카토가 죽었을 당시 스탈린은 무척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카토가 죽은 후 스탈린은 야코프를 처가인 스바니제 일가에 맡기고 떠났다. 이후 1912년이 되어서야 유형에서 탈출하여 한번 찾아보았지만 아들에게 거의 애정을 표시하지 않고 얼마 안 가 떠나버렸다. 이 때문에 스바니제 일가는 스탈린의 매정한 행태에 상당히 분개해했다.[* 심리분석학이 발달한 이후 스탈린의 이러한 행동이 설명되고 있는데, 스탈린은 성격상 뭔가를 잃어버리면 그것을 가슴에 묻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잊어버리든가 아니면 계속 붙들고 있든가 둘 중 하나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의 아내를 잃은 뒤 아들을 볼 때마다 죽은 아내가 떠올라 제대로 된 정치활동이 어려울 것을 스스로 직감하고 의도적으로 정을 끊었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대숙청]] 기간 중에 스탈린의 사생활을 너무 떠들어댄 죄로 [[총살]]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